꾸준함 위에 쌓인 도전으로, 나를 증명하다
김현정
교수(83 물리) 서강옛집 인터뷰
삶의 여정은 선택의 축적이다. 그 선택이 언제나 확신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여기 한 연구인의 태도와 실천은 시간이 지나 성취로 남는다.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83학번으로 자연과학의 길에 입문한 김현정 교수는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30여 년간 그 선택의 과정을 이어왔다.
서강에서 경험한 자유로운 학문 환경과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 그리고 그 안에서 맺어진 인연들은 개인의 도전을 공동체와의 연결로 확장해 왔다. 본 인터뷰는 김 교수의 연구와 교육의 궤적을 통해, 서강이 길러낸
도전의 시간과 그 연결의 의미를 돌아본다.
▲ 모교 물리학과 김현정 교수
---
1. 안녕하세요, 김현정 교수님. 『서강옛집』을 읽고 계신 동문들께 교수님의 이력과 현재 활동에 대해 간단히 소개해 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서강대학교 물리학과 83학번으로 입학해, 서강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미국 퍼듀대학교(Purdue University) 물리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고,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Argonne National Laboratory)에서 박사후연구원(Postdoctoral Researcher)으로 연구를 수행했습니다. 이후 캘리포니아대학교 샌디에이고 캠퍼스(University of California, San Diego)에서도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이어갔으며, 이러한 연구 경험을 바탕으로 2002년 서강대학교에 부임해 현재까지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2. 물리학 분야에서 꾸준히 연구를 이어 오신 가운데, 2025년 11월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으로 선출되신 것은 학문적 성취의 정점으로 여겨집니다. 교수님께 이 성취는 어떤 의미이며, 앞으로 어떤 책임으로 다가오는지 궁금합니다.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는 것은 그동안의 연구 성과와 학문적 기여가 공식적으로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게 느껴집니다. 특히 물리학 분야에서 여성 연구자로서는 최초의 정회원 선출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는데, 그 점에서 개인적인 영광을 넘어 더 큰 책임을 함께 느끼게 되었습니다.
이번 선출이 여성 과학자들이 이뤄 온 성취와 가능성을 사회에 보여주고 발굴해낸 하나의 사례가 되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동시에 후배 과학자들, 특히 물리학을 연구하는 여성 연구자들에게 하나의 롤모델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스스로에게 더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 김현정 교수는 지난 2025년 11월, 2026년도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정회원으로 선출되었다.
3. 교수님의 오랜 연구 여정 속에서, 그동안 교수님께서 가장 도전적이었다고 느끼셨던 순간이 있었다면 말씀 부탁드립니다.
연구 여정에서 가장 도전적이었던 순간을 꼽자면, 박사후연구원 과정에서 연구 분야를 과감히 전환했던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박사 과정에서는 반도체의 광학적인 특성을 보는 연구를 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블루 다이아몬드를 반도체로 활용하는 물성 연구를 수행하며 레이저를 이용한 실험실 기반의 연구를 진행했고, 좋은 성과도 거둘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박사후연구원으로 미국 아르곤 국립연구소에 가면서, 기존에 해오던 연구와는 달리 대형 시설을 이용해야 하는 방사광 가속기(synchrotron) 기반의 X선 과학 연구로 방향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바꾸게 된 동기는 지도교수님의 조언이었습니다. 지도교수님께서는 라만 효과로 노벨상을 받은 라만의 제자이신 분으로, 제가 당시 진행하던 라만 스펙트로스코피(라만 분광법) 연구를 잘 알고 계셨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그 연구를 이어가는 것보다, 엑스레이를 이용한 새로운 접근의 연구를 시도해보는 것이 더 의미 있을 것이라며 방향 전환을 권하셨습니다. 바꿀 당시에는 비슷한 물성 연구라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연구 방식과 환경이 매우 달랐습니다. 개인 실험실 중심의 연구에서 벗어나, 대형 국가·국제 시설을 활용하는 연구로 전환되면서 연구 제안서를 작성해 심사를 통과하고, 제한된 빔타임 안에 모든 실험을 수행해야 하는 구조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박사과정 동안 쌓아온 경험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많은 부담과 고민이 있었고, 다시 처음부터 배우는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도전 덕분에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할 수 있었고, 이후 지속적으로 차별화된 연구를 이어갈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교수로 재직하며 2021년에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연구재단이 지원하는 개인 연구 과제 중 가장 규모가 큰 ‘리더 연구 과제’를 물리학 분야 여성 최초로 수주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당시의 과감한 선택과 도전이 장기적으로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지금 돌아보면 가장 힘들었지만 동시에 가장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뉴스] 김현정 교수,
2021 과학기술정보통신부 리더연구지원사업 선정 ☞
4. 교수님께서는 물리학 분야에서 ‘극초단 상변이’ 연구를 오랫동안 이어오고 계신데요. 방사광가속기와 X-선 자유전자레이저 같은 첨단 시설을 활용하는 연구인 만큼, 비전공자에게는 다소 어렵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 연구가 무엇을 밝히고자 하는지, 그리고 현재 또는 미래의 기술 발전과는 어떻게 연결되는지 쉽게 설명해 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연구하고 있는 ‘극초단 상변이’ 연구는, 물질이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상태를 바꾸는 순간에 원자 수준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지를 밝히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기존에 제가 박사 과정에서 수행했던 레이저 기반 광학 연구는 실험실 규모의 장비로도 가능했지만, X선을 이용한 연구는 규모가 다릅니다. X선은 1895년에 독일 물리학자 빌헬름 콘라트 뢴트겐(Wilhelm Conrad Röntgen)이 처음 발견한 것으로, 파장이 매우 짧아 원자와 원자 사이처럼 극히 작은 구조를 관찰하는 데 적합합니다. 그러나, 진공관에서 발생된 X선은 굉장히 세기가 약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 뒤로 입자 가속기를 1970년대쯤에 활용하기 시작하며 강한 X선을 얻을 수 있게 되었고 이후에 이러한 물질에 대한 연구를 위해 방사광가속기와 같은 대형 시설이 건설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 저는 ‘극초단 상변이’ 연구를 위해 방사광가속기와 X선 자유전자레이저(XFEL)와 같은 첨단 대형 연구 시설을 활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X선 자유전자레이저는 매우 짧은 시간 간격의 강한 펄스를 만들어낼 수 있어,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순간의 변화’를 포착할 수 있다는 점이 저의 연구의 핵심입니다. 예를 들어 물이 얼음으로 변할 때, 우리는 보통 변한 결과만 관찰할 수 있었지만, 이 장비를 이용하면 물 분자들이 어떤 과정을 거쳐 얼음 구조로 재배열되는지를 실시간에 가깝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를 비유하자면, 물질의 구조를 재는 데에도 적절한 ‘자’가 필요합니다. 머리카락의 두께를 측정할 때 미터자로 측정하는 것이 적합하지 않듯이, 원자 간 거리를 관찰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파장을 가진 빛이 필요합니다. X선은 바로 그 역할을 해 주는 빛으로, 원자 수준의 변화를 직접 관찰할 수 있게 해 줍니다.

▲ '극초단 상변이 연구'의 개략도
‘극초단 상변이 연구’는2021년 리더 과제를 시작하면서 현재 제가 더 집중하는 연구로서, 당장 특정한 응용을 목표로 하기보다는 물질이 변화하는 가장 근본적인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기초과학 연구에 가깝습니다. 하지만 발견 당시에는 활용처를 예상하지 못했던 레이저가 오늘날 의료·통신·산업 전반에 널리 쓰이는 것처럼, 상변이의 근본 과정을 이해하는 연구 역시 미래 기술 발전의 중요한 기반이 됩니다. 특히 반도체나 인공지능과 같이 매우 빠른 속도로 작동하는 차세대 소자에서는, 매우 짧은 시간인 펨토초 동안 일어나는 구조적 변화를 이해하는 것이 새로운 디바이스 설계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5. 1998년부터 학자의 길을 걸어오셨고, 또한 모교에서 24년째 교수로서 후학을 양성하고 연구 활동에 매진애 오신 오랜 여정 속, 교수님께서 지켜오신 가치관 또는 원칙이 있다면 무엇인지 여쭙고 싶습니다.
한 분야에서 오랜 시간 연구를 이어오기 위해 가장 중요하게 지켜온 가치가 무엇이었는지를 돌아보면, 결국 ‘호기심’과 ‘꾸준함’이라고 생각합니다. 과학 분야에서 연구는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을 수도 있고, 오히려 잘 풀리지 되지 않아 고민하는 시간이 훨씬 길 수도 있습니다.. 그 과정에서 끝까지 질문을 놓지 않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생각하고 시도해 보는 태도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느껴왔습니다.
제가 석사 과정에서 처음으로 레이저를 이용한 다소 단순한 비선형 광학 연구를 시작했을 때, 실험 장비를 직접 구축하고 미세하게 조정하는 과정이 있었습니다. 당시 손을 아주 조금만 움직여도 신호가 콩나물 크듯이 쑥쑥 크며 눈에 띄게 변하는 순간을 직접 경험하면서 큰 흥미와 경이로움을 느꼈습니다. 이 경험은 이후 제 연구 전반에 걸쳐 실험을 대하는 기본적인 태도를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새로운 현상과 자연의 법칙을 발견하고 수식으로 표현하고 설명하고자 하는 물리 분야에서 연구가 늘 쉽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저도 연구 과정에서 좌절을 겪은 순간도 많았습니다. 박사 과정 초반에는 오랜 시간 어렵게 준비했던 시료에서 현상을 보려 했는데, 그 연구 주제가 이미 잘 알려지지 않은 러시아 저널에 선행 연구로 보고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어 큰 당혹감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을 통해 축적한 지식과 실험적 감각은 이후 전혀 다른 소재인 블루 다이아몬드 연구에서 새로운 현상을 발견하는 데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박사과정 초기의 당시에는 남들도 다 하는 단순한 연습처럼 느껴졌던 연구들이, 결국 예상하지 못한 지점에서 새로운 발견으로 이어졌던 것입니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에도 학생들과 함께 연구를 이어오면서 비슷한 경험을 반복해 왔습니다. 연구가 가장 의미 있는 성과로 이어지는 순간은 대개, 모두가 어렵다고 느끼고 포기하고 싶어지는 고비를 지나온 뒤였습니다. 이러한 경험을 통해 저는 연구와 교육 현장에서 늘 도전과 꾸준함의 가치를 학생들에게 전하고자 노력해 왔습니다.
돌이켜보면, 특별한 비결이 있다기보다는 잘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순간에도 호기심을 잃지 않고 계속 시도해 온 시간이 오늘의 연구로 이어졌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제가 연구자이자 교육자로서 오랫동안 지켜오고자 했던 가장 중요한 원칙입니다.
6. 교수님께서는 30년 가까운 시간 동안 모교 서강과 학생으로, 연구자로, 그리고 교육자로서 깊은 인연을 맺어 오셨습니다. 그 긴 여정 속에서 교수님께서 체감하신 서강만의 정서 혹은 문화가 있다면, 그것이 교수님의 삶과 연구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말씀해 주실 수 있을까요?

▲ 서강대학교 물리학과와 랩실은 리치과학관(R관) 10층에 위치해 있다.
서강대학교에 입학했을 당시를 돌아보면, 무엇보다 서강에 애정을 가졌던 계기는 ‘학생을 위한 학교’라는 느낌을 받았던 때였습니다. 학생운동이 활발한 시대였고, 그래서 타 대학에서 들리는 이야기에 따르면 학교와 학생 사이에 거리감이나 위계가 있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서강의 교수님들뿐 아니라 행정 직원분들, 학교 구성원 전반이 학생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고 존중해 준다는 분위기가 서강의 기저에 있다고 느꼈었습니다.
이 정서가 시간이 지나 지금까지도 서강만의 문화로 이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서강대 학생들은 전반적으로 성실하고 자기 관리에 충실하며, 과한 경쟁보다는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경향이 강합니다. 이를 일종의 ‘자유롭고 절제된 개인성’이라고 생각하는데, 이러한 분위기가 공정하고 신뢰할 수 있는 서강대 출신이라는 사회적 인식으로도 이어지고 있다고 봅니다.
연구와 교육의 측면에서도 서강의 문화는 제게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서강은 비교적 수평적이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연구와 교육이 이루어지는 공간입니다. 덕분에 연구자로서 새로운 시도를 함에 있어 심리적 부담이 적었고, 학생들과의 관계에서도 보다 열린 태도로 소통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인상 깊었던 점은, 서강의 공동체 문화가 생각보다 포용적이라는 사실입니다. 타 대학 출신 대학원생이나 박사후연구원이 서강에 와서 느끼는 분위기에 대해 긍정적인 이야기를 여러 차례 들었습니다. 연구 활동에 있어 소속을 따지기보다, 기꺼이 도와주려는 문화가 자연스럽게 형성되어 있다는 점은, 서강만의 강점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태도는 어쩌면 서강이 지켜온 가톨릭 정신, 즉 타인을 존중하고 공동체 안에서 함께 성장하고자 하는 가치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앞으로의 서강이 한 단계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개인의 성취를 넘어 서로를 조금 더 적극적으로 끌어주고 연대하는 문화가 강화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있습니다. 자유롭고 자율적인 분위기 속에서, 동시에 서로를 북돋우는 공동체로 나아간다면 서강만의 정서는 더욱 단단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학생으로, 연구자로, 교육자로 함께해 온 지난 시간은 제 삶과 연구 전반에 깊은 영향을 미쳤고, 앞으로도 그 가치는 계속 이어질 것이라 믿습니다.
7. 과학 기술 분야는 빠르게 변하고 있으며, 특히 국제 공동연구의 중요성도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교수님께서는 앞으로 물리학을 포함한 과학 전반의 연구 방식이 어떤 방향으로 연결되고 확장되어 갈 것이라고 전망하시는지 궁금합니다.
앞으로의 과학 연구 흐름을 이야기할 때, 저는 크게 두 가지 방향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하나는 국제 공동연구의 방식 변화이고, 다른 하나는 인공지능(AI)이 연구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먼저 국제 공동연구와 관련해서는, 연구가 이루어지는 ‘장소’의 의미가 과거와는 크게 달라졌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현재 수행하고 있는 연구는 특정 실험실에 국한되지 않고, 세계 여러 나라의 방사광가속기와 X선 자유전자레이저 같은 대형 연구 시설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구 환경에서는 자연스럽게 국경을 넘는 협력이 필수적이 됩니다.
▲ 김현정 교수는 지난 2025년 9월 말 스웨덴 MAX-IV연구소와 제2회 첨단 X-선 과학 심포지움을 개최하는 등 계속해서 글로벌한 환경에서 연구 협력을 이어오고 있다.
개인적인 경험을 돌아보면, 박사후연구원 과정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올 당시에는 이러한 국제 공동연구를 이어가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미국에서 박사후연구원으로서 연구할 때는 지도 교수님도 유명하신 분이었기에 세계적인 연구자들과의 협업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지만, 한국으로 돌아온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공동연구 논의가 갑자기 끊기는 경험도 했습니다. 당시에는 한국이 국제 공동연구의 주요 거점으로 인식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에, 연구자로서 적지 않은 고민과 도전을 마주해야 했습니다. 미국 교수로서의 삶이라는 선택지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연구 방향을 바꾸기보다는, 국제 대형 시설을 활용하는 연구를 꾸준히 이어갔습니다. 물론 실험을 하기 위해 세계의 방사광 가속기 시설을 사용하기 위해서 학생들과 함께 해외 출장을 계속해서 다녀와야 했기에, 연구비와 여건 면에서 쉽지 않은 선택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는 1년에 세 번씩 실험하러 갔던 꾸준한 노력을 인정받아, 미국 스탠포드 대학의 SLAC 국립연구소에 위치한 세계 최초의 X-선 자유전자레이저 시설인 LCLS가 시작될 때, 아시아 지역을 대표해 국제 공동연구자들을 모아 장비 사용을 위한 제안서를 내면 좋겠다는 제안을 받았습니다. 이 경험을 통해 느낀 것은, 이제는 어느 나라, 어느 대학에 소속되어 있는지가 아니라, 어떤 연구를 하고 어떤 그룹으로 인정받느냐가 훨씬 더 중요해졌다는 점입니다.
실제로 제 연구실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학생들이 스탠포드 대학 슬랙 연구소, 아르곤 연구소 등 세계 유수의 연구소로 박사후연구원으로 진출하고 정규직 연구원으로 연구를 이어가고 있다는 사실 역시, 연구의 질과 국제적 신뢰가 확보된다면 연구의 거점은 어디든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합니다. 최근에는 4세대 방사광 가속기를 개발 중인 스웨덴의 막스포 국립연구소와 상호양해각서(MOU)라는 공식적인 협력 관계를 맺으며, 서강대학교에서 수행되는 연구가 세계적으로 연결되고 확장되는 흐름을 체감하고 있습니다.
▲ 지난 2024년 9월, 김현정 물리학과 교수가 이끄는 극초단 상변이 연구단이 스웨덴 MAX-IV 국립연구소와 첨단 X-선 과학기술 교류 협력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있다.
두 번째로는 인공지능이 과학 연구에 미치는 영향입니다. 최근 AI의 발전으로 인해 연구자의 역할 축소에 대한 우려가 있으나, 저는 과학 분야에서 AI는 경쟁자가 아니라 효율을 높여주는 강력한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방대한 기존 연구 데이터를 빠르게 분석하고, 복잡한 계산이나 반복적인 분석 과정을 효율화함으로써 연구자의 부담을 크게 줄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AI가 새로운 과학적 아이디어 자체를 만들어내기는 어렵겠지만, 이미 축적된 지식과 데이터를 활용해 연구자가 더 빠르게 본질적인 질문에 도달하도록 돕는 역할은 충분히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변화는 결과적으로 과학 연구의 속도와 깊이를 모두 확장시키는 방향으로 작용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종합해 보면, 앞으로의 과학 연구는 특정 국가나 기관에 머무르기보다는 국제적으로 더욱 긴밀하게 연결되고, 동시에 AI와 같은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확장될 것입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중요한 것은 변화에 대한 두려움보다, 새로운 도구와 협력 방식을 어떻게 주도적으로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자의 태도라고 생각합니다.
8. 서강을 중심으로 한 선후배 연구자들과 동문들과의 관계 역시 교수님의 연구자로서의 삶에서 중요한 자산으로 작용해 왔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러한 연결과 인연이 교수님께 어떤 힘과 영감을 주었는지, 그리고 그 가치가 후배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하시는지 들려주실 수 있을까요?
서강대학교로 돌아오면서 제자가 곧 후배가 된다는 사실은 제 연구자 인생에서 매우 큰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사실 학교로 복귀하기 전에는 미국에서 연구소나 대학에 남는 선택지도 고민했지만, 모교에서 ‘가르치고 연구하는 역할’에 대한 열망이 제 안에 훨씬 크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로 인해 대학에서의 길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연구소에서는 연구자들이 다들 동등한 위치에서 연구를 진행하지만, 대학에서는 연구를 처음 접하는 학생들과 함께 출발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학생들이 연구의 기초부터 낯설어 하는 모습을 보며 막막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 제가 지도한 방식대로 학생들이 성장하고, 스스로 새로운 연구를 수행하며 연구자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연구소에서 느끼던 성취와는 또 다른, 훨씬 큰 보람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특히 졸업한 제자들이 각자의 진로를 찾아 성실하게 자신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볼 때, 교육자로서의 선택이 옳았음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 김현정 교수는 교육자로서 후학을 양성함에 있어 연구 활동의 성과를 달성하는 것 이상의 귀중한 의미를 찾았다고 말한다.
또한 서강대학교가 지닌 고유한 가치 역시 저에게 큰 힘이 되어 왔습니다. 개인의 성취를 추구하면서도 타인을 배려하고, 함께 성장하려는 태도, 그리고 도전과 성취에 대한 강한 열망은 서강 구성원들이 공유하는 중요한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가치가 연구와 교육의 현장에서 최대한 발휘될 때, 서강만의 저력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고 느낍니다.
현재도 저는 해외 대형 연구시설을 활용한 연구와 국제적인 기관의 자문 및 심사 위원회에서 활동하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국내외 여러 동문들을 만나게 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연구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동문들의 모습을 보며, 서강대학교 출신 연구자들이 지닌 잠재력과 저력을 다시 한 번 실감하게 됩니다. 이러한 연결과 인연이 앞으로도 후배들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져, 서로에게 영감과 버팀목이 되는 공동체로 계속 확장되기를 기대합니다.
9. 2026년 새해는 총동문회에서 ‘도전과 연결’이라는 가치를 다시 새기는 시간입니다. 이 키워드를 중심으로, 서강동문 사회와 서강공동체 구성원들, 그리고 서강의 연구자들과 학생들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돌이켜보면, 인생의 중요한 선택들을 할 당시에는 무엇 하나 분명하게 정해져 있던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미래는 언제나 불확실하고, 그렇기 때문에 불안하고 망설여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많듯이, 그 순간에는 ‘마음이 끌렸던 선택’을 믿는 것이 결국엔 자신의 것이 되고, 자신의 도전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즉, 스스로를 의심하지 말고 꾸준히 도전해 나가며 나에 대한 확신을 갖도록 연습하는 것입니다.
저는 늘 학생들에게도 이야기합니다만, 결국 자신에 대한 평가는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 자신을 어떻게 믿고,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집니다. 처음부터 확신을 가지고 출발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다만, 내가 내린 결정을 스스로 옳은 결정으로 만들어 가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 또한 유학을 떠날 때나 이후의 진로를 선택할 때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희 부모님께서는 유학 가기 전에는 금방 돌아오면 좋겠다고 하셨지만, 미국에 간 뒤로는 당시에 미국의 연구환경이 더 좋다고 판단하셔서 오히려 미국에 머무는 것이 좋겠다고 하셨어요. 결국 결정은 제가 해야 하는 것이기에, 불확실성 속에서 내린 결정이 시간이 지나 ‘맞는 선택’이 되었던 것은, 그 결정을 책임지고 밀고 나갔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젊은 세대, 특히 학생들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더 많은 고민을 안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사실 이런 고민은 어느 세대에나 존재해 왔고, 중요한 것은 주저하는 시간 속에서도 작은 도전을 통해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선택하지 않은 길에 대한 미련은 남을 수 있지만, 결국 내가 가보지 않은 그 길이 반드시 더 나은 길이었을 것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결국 자신이 선택한 길에 확신을 갖고 도전하는 태도가 가장 중요합니다.
저는 자주 수업이 끝나는 시기에 이를 야구에 비유해 설명하곤 합니다. 타율 3할이나 4할만 되어도 매우 뛰어난 타자입니다. 이는 열 번 중 세네 번 성공한다는 뜻이지만, 동시에 여섯 번에서 일곱 번은 실패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실패만 놓고 본다면 좌절할 수 있겠지만, 전체를 보면 충분히 훌륭한 성취입니다. 인생도 마찬가지로, 한 번의 실패나 좌절에만 매몰되기보다는 긴 흐름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일이 항상 잘 풀릴 수는 없고, 오히려 잘되지 않았던 경험을 통해 더 많은 것을 배우고 다음 단계를 준비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에게는, 대학생으로서 누릴 수 있는 시간과 경험을 충분히 누리기를 권하고 싶습니다. 대학생이기 때문에 가능하고 쉽게 도전할 수 있는 다양한 경험들을 해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경험들은 훗날 사회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 큰 자산이 됩니다. 한 번이라도 직접 경험해 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시야는 분명히 다르기 때문입니다.
‘도전과 연결’이라는 총동문회의 가치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매우 의미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도전해 온 경험들이 서로 연결될 때, 개인의 성취를 넘어 공동체 전체의 힘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서강 공동체 구성원 모두가 스스로를 믿고 두려움에 머무르기보다 도전을 선택하며, 그 과정에서 쌓은 경험과 이야기를 서로 나눌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연결 속에서 더 큰 가능성과 새로운 미래가 열릴 것이라 믿습니다.
---
김현정 교수의 연구 여정은 도전이 거창한 결단이 아니라, 불확실성 속에서도 자신의 선택을 끝까지 책임지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점을 보여준다. 실패와 시행착오마저 배움으로 축적하며 걸어온 그의 시간은 결국 하나의 성취로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개인의 도전은 서강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고립되지 않고 자연스럽게 연결돼 왔다. 자유로운 학문 환경과 사람을 존중하는 문화 속에서 축적된 경험들은 세대를 넘어 확장되며 새로운 가능성을 만들어 왔다.
‘도전과 연결’은 분리된 가치가 아니다. 각자의 자리에서 내린 선택들이 서로를 잇고, 그 연결이 다시 다음 도전을 가능하게 한다. 이러한 순환 속에서 서강의 저력은 앞으로도 이어질 것이다.
글 | 한서정(23 경영) 서강옛집 기자, 서강옛집 담당 이수민(14 수학)
사진 | 김현정 교수, 서강대학교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