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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 발굴한 북한 전쟁고아들의 역사- 김덕영(84 철학) 감독, <김일성의 아이들> 6월 25일 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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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20-05-26 11:19 조회25,340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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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에서 발굴한 북한 전쟁고아들의 역사

- 김덕영 감독, <김일성의 아이들> 6월 25일 개봉


글 _ 권경률 (90 사학)

인터뷰 _ 권경률(90 사학), 안수진(10 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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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84 철학)의 다큐멘터리 영화 <김일성의 아이들>이 6월 25일 CGV에서 개봉한다. 

<김일성의 아이들>은 한국전쟁 직후 동유럽으로 간 북한 전쟁고아들의 감춰진 역사를 담고 있다. 

김 감독은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를 넘나들며 생존 증인과 빛바랜 자료를 찾아 고군분투했다. 역사의 퍼즐을 맞춰나가면서 그가 발견한 가치는 무엇일까? 

 

김덕영 감독을 만나 쉽지 않았던 다큐멘터리 여정을 돌아본다.

 

 

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

“처음 제보를 받은 것은 2004년이었습니다. 철학과 선배 박찬욱 감독님이 연락을 주셨어요. 루마니아의 어떤 할머니가 40년 넘게 북한인 남편을 기다리고 있다는 겁니다. 

그 배경이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 전쟁고아들이 동유럽에 보내졌는데 그 인솔자였던 남편과 결혼했다고 합니다.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습니다.”

 

김덕영 감독은 9박 10일 일정을 잡고 루마니아로 날아갔다. 조르제타 미르초유 할머니는1950년대에 북한 전쟁고아들을 가르친 교사였다. 

당시 소련은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과시하기 위해 북한 전쟁고아들을 동유럽 각국에 맡겨 위탁교육을 받게 했다. 

1951년부터 5천 명 이상의 아이들이 루마니아,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 등지로 들어갔다. 

할머니는 전쟁고아들을 데리고 루마니아에 온 북한 책임자 조정호와 사랑을 나누고 1957년 결혼했다.

 

그러나 1956년 말부터 헝가리, 폴란드 등 동유럽 여러 나라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북한 유학생들의 망명사건이 터지자 강제 송환이 이루어졌다. 

북한 전쟁고아들은 1957~1959년 사이에 본국으로 돌아갔는데, 미르초유도 남편 조정호를 따라 평양행 열차에 올랐다. 

한편 북한에서는 ‘8월 종파사건’이 일어나 소련파와 연안파가 숙청되었다. 김일성 정권은 조선식 사회주의,주체사상을 내세우며 외국인과 외국 문명을 배척했다. 

고위 간부였던 조정호는 탄광으로 쫓겨났고, 미르초유 또한 1962년 딸과 함께 북한을 떠나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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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덕영 감독은 서둘러 1950년대 북한 전쟁고아들에 대한 현지 자료 수집에 나섰다. 디지털 아카이브가 없던 시절이라 루마니아 문서보관소를 구석구석 뒤져야 했다. 

다행히도 귀국 직전에 근거 자료를 입수했다. 4분 30초짜리 기록필름과 사진, 그리고 “우리 아이들을 보살펴줘서 고맙다”는 김일성 명의의 전보였다.

 

다큐멘터리는 그해 6월 <미르초유, 나의 남편은 조정호입니다>라는 제목으로 KBS에서 방영되었다. 

한국전쟁 직후 북한 전쟁고아들이 동유럽에서 위탁교육을 받았다는 사실이 처음으로 알려지면서 화제가 되었다. 

북한에서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김 감독은 루마니아뿐 아니라 폴란드, 체코, 헝가리, 불가리아까지 취재해 북한 전쟁고아들의 역사를 복원하리라 마음먹었다.

 

하지만 막막했다. 생존한 증인과 역사적인 자료가 어디 있는지 도통 알 수 없었다. 의사소통부터 난관이었다. 동유럽은 영어가 잘 안 통하고 나라마다 언어도 달랐다. 

비용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해마다 새 다이어리 맨 앞장에 ‘북한 전쟁고아’라고 적고 새로운 정보를 업데이트하며15년을 보냈다.

 

 

‘마음의 고향’ 그리워 목숨 걸고 국경 넘은 아이

“사막이 아름다운 것은 어딘가에 샘을 감추고 있기 때문이야.” 

프랑스 작가 생떽쥐베리는 인생의 모험과 가치를 이토록 아름답게 표현했다. 

 

소설과 달리 현실은 만만치 않다. 샘이 어디 있는지도 모른 채 태양이 작열하는 사막 속으로 걸어 들어가려면 목숨을 걸어야 한다.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이 들어야 모험에 나설 수 있다. 

2019년 1월 5일 김덕영 감독은 마침내 북한 전쟁고아들의 역사를 찾아 장도에 올랐다.

 

“과연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물었습니다. 더 늦기 전에 나약함을 떨치고 가치 있는 일에 인생을 걸어보기로 했습니다. 

경비는 운영하던 가게를 팔아서 마련했습니다. 충분하진 않았지만 제가 발품을 더 팔면 되니까요. 

힘들어도 동유럽 낯선 땅에 떨구어진 북한 전쟁고아들과 기꺼이 마음의 고향이 되어준 현지인들의 감춰진 역사, 그 감동적인 휴머니즘을 꼭 카메라에 담고 싶었습니다.”

 

당시 아이들은 동유럽 각국에 분산되어 머물렀다. 기록에 따르면 루마니아 3천 명, 폴란드 1천400명, 체코 700명, 헝가리 500명, 불가리아500명 등이었다. 

1951년부터 들어갔는데 생면부지의 고아들을 맡지 않으려는 국가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이 나라들도 먹고 살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소련의 군사적 압박과 경제적 회유에 어쩔 수 없이 받기는 했지만 여론을 의식해 비밀리에 위탁교육을 진행했다. 

 

그래서일까? 

아이들의 발자취를 따라 김 감독이 찾아간 곳들은 대개 은폐된 장소였다. 폴란드 프와코비체는 실개천이 둘러싸고 작은 다리 하나로 오가는 마을이었다. 

원래 정신병원이 자리 잡고 있었다는데 다리가 없으면 완전히 고립되었다. 

체코 발레치 마을에서는 과거 독일 귀족들이 버리고 간 성을 활용했다. 명칭은 나라마다 조금씩 달랐다. 루마니아는 ‘조선인민학교’, 체코는 ‘김일성학원’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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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북한 전쟁고아들만 몰아놨다. 평균 연령 10세의 아이들이라 언어 습득력이 무척 좋았다. 1년 만에 현지어가 되면서 완전히 새로운 인생이 펼쳐졌다. 

현지인 교사들을 엄마, 아빠라고 부르며 따랐고 마을 아이들과도 우정을 쌓았다. 위탁교육이 진행되는 동안 연애사건 등 별의별 일들이 일어났다. 

어느덧 초고령이 된 백발의 증인들이 그 생생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그들이 공통적으로 묘사한 장면이 있었다.

 

“따로따로 증언을 받았지만 아침조회 묘사는 똑같았습니다. 6시 30분 기상, 아침체조, 인공기 게양식, 김일성 찬가 순이었습니다. 

루마니아에서 아침조회를 담은 기록필름을 찾았는데 인공기에 별보다 큰 김일성 사진을 붙였더군요. 

불가리아에서는 노인들이 촬영하다가 갑자기 한국말로 노래를 불렀습니다. 알고 보니 ‘김일성 장군의 노래’였습니다. 

이 영화는 휴머니즘에서 출발했습니다만 김일성주의에 대한 새로운 발견도 담겨 있어요. 그것이 면면이 흘러 오늘날 북한 체제의 근원을 이루고 있죠.”

 

195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북한은 전쟁고아들을 고급 인재로 키워 국가 재건에 활용하려고 했다. 마을을 떠나 대도시 상급학교에 진학하는 학생들도 나타났다. 

석탄연료 등 앞선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였다. 김일성도 1956년 동유럽 국가들을 순방하며 위탁교육에 감사하고 교류협력을 모색했다. 

그러나 동유럽에 반소련 시민혁명이 일어나고 북한 내에서 종파사건이 터지자 시각이 달라졌다. 

국가 재건의 희망으로 여겨지던 전쟁고아들은 점차 체제를 위협할 골칫거리로 내몰렸다.

 

“북한 교사들은 역사, 헌법을 가르쳤고 현지 교사들은 문학, 예술을 가르쳤습니다. 동유럽 문학과 예술은 전통적으로 자유를 추구합니다. 김일성주의에 의문을 품는 아이들이 생기죠. 

실제로 북한 아이 2명이 기차를 타고 서쪽으로 가다가 오스트리아 국경에서 붙잡혀요. 신분은 불분명한데 주소지가 폴란드 프와코비체였습니다. 

북한 전쟁고아였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이들은 결국 북한으로 압송되었다고 합니다.”

 

북한은 동유럽에 시민혁명이 번진 1956년 말부터 전쟁고아들을 송환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갑자기 북한 관리자들이 와서 아이들을 기차에 태웠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고아들에게는 그곳이 집이자 고향이었다. 

 

선생님을 엄마, 아빠라고 불렀다. 친구, 연인도 모두 거기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짐을 싸서 북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니, 받아들이기 어려운 아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루마니아에서는 7살 꼬마가 기차 타기 직전에 모습을 감춰버렸다. 학교 수위를 아빠처럼 따랐고, 그이 또한 자식으로 입양하려던 아이다. 

 

한 명이 안 보이자 북한으로 돌아가려고 말쑥하게 차려입은 학생들이 모두 수색에 나섰다. 

때마침 퍼부은 비를 쫄딱 맞으며 산으로 들로 찾아 헤매게 한 것이다. 

산에서 발견된 아이는 몰매를 맞고 다리가 부러졌다고 한다. 꼬마가 절뚝거리면서 기차에 타던 모습을 마을 주민들은 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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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송환 이후 전쟁고아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그들의 삶은 교사와 친구들에게 보낸 편지에 일부 전해진다. 아이들이 향한 곳은 대부분 탄광이나 공장이었다. 외국에서 배우고 익힌 것들은 환영받지 못했다. 

전쟁고아들은 동유럽의 엄마 선생님과 마을 친구들에게 현지어로 편지를 썼다. 필기구를 보내 달라는 하소연도 담겨 있었고, 누가 어떻게 사는지 근황도 적혀 있었다. 

한 12살 소년은 ‘엄마’가 보고 싶다며 무작정 길을 나섰다. 소년은 끝내 중국과 몽골의 국경지대에서 늪에 빠져 죽었다. 

기아에 허덕이다가 목숨이 다하는 순간까지 ‘집’에 닿으려고 안간힘을 쓴 것이다.

 

바스러질 것 같은 그 빛바랜 편지들이 지금은 생생한 수기이자 역사적인 자료가 되었다. 하지만1959년에 북한이 서신 왕래를 금지하면서 그들의 소식은 끊어지고 말았다. 

‘마음의 고향’을 향한 아이들의 그리움은 출구를 찾지 못한 채 북녘땅에 맴돌고 있다. 

김덕영 감독은 다큐멘터리 인생 최초로 주인공들을 만나지 못했지만 동유럽5개국을 누비며 역사의 퍼즐을 맞춰 그들의 참모습을 <김일성의 아이들>에 담았다.

 

 

서강의 어깨 위에서 바라본 다큐멘터리 세상

“내가 더 멀리 내다보았다면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선 덕분이다.” 

아이작 뉴턴이 남긴 이 멋진 문장을 김 감독은 즐겨 인용한다. 

 

학창 시절 그는 강의실 대신 시청각실에 개근하면서 다큐멘터리 영화의 꿈을 키웠다. 1980년대에 서강대학교 시청각실은 국내에서 접하기 어려운 귀한 비디오 콜렉션을 갖추고 있었다. 

알프레드 히치콕,장 뤽 고다르 등 거장들의 작품을 보려고 영화학도들이 몰려들 정도였다. 김 감독도 그 거인들의 어깨 위에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김덕영 감독은 사실 학교 다닐 때 꽤 유명했다. 1990년 서강TV 개국의 주역이었기 때문이다.전국 대학 최초로 교내에 TV방송국을 만든 것이다. 

학교에서 예산을 편성하는 공식 조직이 아니었기에 변변한 기자재도, 건사할 운영비도 없이 출발했다. 

장비를 구입하고 후배들을 보살피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더 뛰었다. 

이듬해 개국한 한양TV는 학교에서 1억 원을 지원받아 고가의 편집장비를 구입했는데, 서강TV는 비디오데크 2개를 붙여놓고 감으로 짜깁기를 해야 했다.

 

“나는 왜 이렇게 살까, 고민했습니다. 사회는 체계와 조직에 따라 움직이는데 저는 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실천이 중요하다고 봤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생고생을 하는 겁니다.(웃음) 개인의 아이디어가 싹이라면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도록 돕는 게 사회의 몫입니다. 

알맞은 햇빛과 토양, 수분과 양분을 제공해주는 게 선진사회죠. 미국의 실리콘밸리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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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의 자유로운 생각과 실천을 중시하는 사람답게 서강대학교에서 전국 대학 최초로 나눠준 영상 졸업앨범도 그의 작품이었다. 

1992년 가을 김 감독은 서강TV 캐비닛에 가득한 비디오테이프를 보다가 재미있는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그는 총학생회에 찾아가 졸업비 5만 원에 포함된 기념품값으로 영상 졸업앨범을 제작하자고 제안했다. 

서강TV가 갖고 있는 학교행사 영상을 편집하고 졸업사진 촬영할 때 인터뷰를 따면 의미있는 기념품이 될 것이라고 설득했다. 총학생회는 대환영이었다. 

총학생회가 앞장서서 학생처의 허가를 받았고 이듬해 2월 ‘서강 비디오 이어북’이라는 이름의 영상 졸업앨범이 나왔다.

 

3년간 이 사업을 진행하며 만성 자금난이 해소되었다. 제작비용을 제하고 남는 돈으로 김덕영 감독은 숙원사업에 나섰다. 

학생회관에서 도서관, 인문관, 이공관을 연결하는 케이블 공사를 벌이겠다는 것이었다. 

그동안 라운지에 TV놓고 비디오테이프 꽂아 방송했는데 이제 스튜디오에서 방송 신호를 쏘겠다는 것이었다. 

명실공히 케이블TV로 업그레이드시킬 참이었다.

 

여기서 아마추어의 실수가 나왔다. 예산을 짜다가 그만 인건비를 빠뜨렸다. 케이블과 장비는 샀는데 공사인력은 구할 수 없게 되었다.

김 감독은 고민 끝에 직접 공사를 벌이기로 했다. 

공사를 위해 아스팔트를 깨뜨리고 케이블 작업을 해야했다. 공사할 수 있는 기간은 여름방학 뿐, 1994년 역사적인 무더위로 기록된 그 뜨거운 여름날,

김 감독과 후배들은 곡괭이와 삽을 들고 공사를 감행했다.

아스팔트를 곡괭이로 깨뜨리고, 그 아래 흙은 삽으로 파고, 케이블 매설하고, 중간중간 신호 증폭기 심고, 다시 흙과 시멘트로 덮었다.

'공구리' 치는 법도 그때 익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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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강TV개국과 영상 졸업앨범이 전국 대학 최초라면 이 케이블TV공사는 전설로 회자되었다. 덕분에 김덕영 감독은 학생 신분으로 뉴스에 오르내렸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 그는 서강대학교의 햇빛과 토양, 수분과 양분을 제공받았다. 

그렇다면 서강에서 가장 좋았던 기억은 무엇일까?

 

"제가 학과 공부는 열심히 안 했는데 딴 공부 하느라 도서관에 늦게까지 있었습니다. 밤 10시에 도서관 문 닫으면 교문 쪽으로 나갔는데요. 

항상 불야성을 이루던 사제관이 인상깊었습니다. 예수회 신부님들이 밤잠 줄여가면서 공부하셨던거죠. 

도서관 로욜라상 앞에서 사색에 잠겨 산책하시는 노신부님들도 멋져 보였어요. 진리를 향한 수행이랄까.

다큐멘터리도 그래야 합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진리와 통하는 법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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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일성의 아이들>은 ‘작은 거인’ 서강의 어깨 위에서 바라본 다큐멘터리 세상이다. 

2020년 5월 현재 뉴욕국제영화제, 니스국제영화제 등 8개 영화제에 초청을 받았다. 


한 해 수백 편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지지만 극장에서 상영되는 작품은 70~80편에 불과하다. 

코로나 때문에 극장 잡기가 더욱 힘들어진 상황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개봉은 기적에 가깝다. 


김덕영 감독의 작품세계가 빛을 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서강이 응답할 차례다. 


6월 25일 CGV 개봉. 단체관람 예약 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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