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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나고 싶었습니다 - 이해인(석사 82 종교) 수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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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작성일18-05-02 09:08 조회14,371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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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생활 50년은 세월이 준 소중한 선물

 

첫 서원 날. ‘주님 저를 받아주소서.’

장미 속에 파묻힌 사랑의 여인들.

바들바들 떨리는 환희의 오늘.

주님, 당신은 제게 이렇게도 크게 갚아주시는 것입니까?

이제부터 내 이름은 클라우디아 수녀라고 불린다. 내 생애 최고의 날.

기쁘고 기쁜 날.

(1968. 5. 23, 일기에서)

 

친근한 일상어의 소박한 아름다움으로 수많은 독자의 마음과 영혼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온 시인이자 수필가 이해인(석사 82 종교) 수녀가 5월 23일 수도서원 50주년인 금경축을 맞는다. 금경축 기념으로 지난해 연말 6년 만에 발표한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은 현재 10쇄를 찍어낼 정도로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다. 화려한 봄꽃들로 눈부신 부산 광안리의 올리베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원 <해인글방>에서 겹벛꽃처럼 수수하고도 고운 이해인 수녀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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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 50주년 금경축 감사 미사.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이해인 수녀  

 

●● 수도서원 50주년 맞으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대단한 경사입니다. 소감이 어떠신지요?

1964년 수도회에 입회했고 68년 5월 23일 첫 서원을 했으니 벌써 50년 되었네요. 서원장을 옆에 끼고 금경축 감사 미사에 가는데 눈물이 막 나더라고요.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 수도생활을 중간에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걸어온데 대한 진정한 기쁨, 누구라도 사랑하고 모든 잘못도 용서하고 싶은 마음…. 힘들다고 도중 하차 했으면 이런 시간을 맞을 수 있었을까 생각하면 자부심도 들었고요. 불가(佛家)에서 말하는 환희심이 이런 거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지요.

 

특히 감사한 것은 저를 포함해 종신 서원했던 동기 11명 모두 금경축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이젠 나이 들어 몸도 병들고 젊은 날에 비해 볼품없이 초췌한 모습들이지만 서로의 50여년 수도생활을 든든하게 지켜준 동지들입니다. 제가 투병중일 때도 ‘비록 지금 암에 걸렸지만 우리랑 함께 금경축은 하고 죽어야 한다’고 걱정스레 웃으며 격려해준 사람들도 동기 수녀들이에요. 금경축을 맞고 보니 모든 것들은 세월이 제게 준 아름답고 감사한 선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 금경축 기념으로 발간한 산문집 「기다리는 행복」이 독자들의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어떤 의미를 지닌 책인가요?

책 앞부분에서 밝혔듯이 사랑으로 저를 키워준 수도 공동체와 저를 수도자로 이끌고 평생 제 인생 여정의 멘토였던 언니 수녀에게 헌정하는 책입니다. 또 오랜 세월 제 충실한 ‘애인’이 되어주신 독자들과 금경축의 기쁨을 나누는 책이기도 하고요. 개인적으로는 수도원에서 살아온 반세기 세월에 감사하는 마음을 담은 책이기도 합니다.

 

책에는 지난 6년간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글들과 첫 서원하고 난 20대 젊은 수녀의 풋풋했던 일기들을 단편적으로 뽑아 실었습니다. 책 제목은 1979년도에 나온 「내 혼에 불을 놓아」라는 시집의 마지막에 실린 산문시 ‘기다리는 행복’에서 따온 거예요. 행복이 끊임없는 기다림과 인내의 결실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제목 같아서 「기다리는 행복」을 책 제목으로 정하게 됐어요.

 

●● 수도자가 된 계기, 시인이 된 계기 그리고 수도자이자 시인으로 살아오신 시간들이 궁금합니다.

저 보다 10년 먼저 수녀가 된 언니의 영향이 컸어요. 언니 수녀는 방학 때 편지를 보내곤 했는데 수도원 생활의 아름다움에 대해 늘 이야기했지요. 또 당시 사회 분위기 탓인지 인간은 태어나면 하나 밖에 없는 삶을 인류를 위해 바쳐야 한다는 일종의 불타는 인류애 내지는 이타심 같은 것에 마음이 끌렸어요.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망설임 없이 수도회에 들어갔지요.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걸 좋아했어요. 중학생 시절 문예반에서 활동했고 여고시절 여러 백일장에 나가서 입상하며 선생님들께 인정받고 격려 받는 게 기뻤어요. 그러나 수도자가 되면서 문학은 포기해야 한다고 생각해 가끔 혼자만의 노트에 글을 적어두곤 했었는데, 당시 수도원 원장님께서 어느 원로시인에게 그동안 써 모은 시를 보이게 했고 그 분이 혼자 보기 아깝다고 출판을 적극 권유하여 1976년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가 세상에 나오게 되었어요.

 

제 인생을 요약한다면 수도자로 50년, 시인으로 40년, 암환자로 10년을 보낸 셈이에요. 수도자  ‘이명숙’, 시인 ‘이해인’이라는 두 존재로 살며 두 역할 속에서 참 힘들었지만 내가 기꺼이 선택한 수도자의 삶과 내 글을 싫증 안내고 꾸준히 읽어주고 격려해주시는 독자들이 있어서 여기까지 왔습니다. 제 영혼을 길들이기 위한 하느님의 교육방법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 오랫동안 암으로 투병하셨기 때문에 수녀님의 건강에 대해 염려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막상 뵈니 매우 건강하고 쾌활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그동안 여러 가지 소문들이 많았었는데요.

암 환자라는 고정관념 그리고 저와 친하게 지냈던 장영희 교수, 김점선 화가, 박완서 선생이 비슷한 시기에 모두 암으로 돌아가셨기 때문인지 걱정을 많이 해주셨던 같아요. 지금도 인터넷 검색 사이트에 제 이름을 치면 사망, 위독, 선종 같은 루머성 단어가 함께 뜬다고 해요. 특히 피정 중이거나 연락이 잘 닿지 않을 때 그런 소문이 많이 돌았던 것 같아요. 저를 위해 연도를 바친 분도 있고 심지어는 미국에서 발간되는 모 신문(미주 중앙일보. 2015년 12월 28일자)에는 저를 추모하는 절절한 추모사가 게재되기도 했어요. 고별사를 보내준 분도 있고. 아마도 살아서 이런 대접을 받은 건 제가 처음이 아닐까 싶네요(웃음). 덕분에 이 세상에서의 제 마지막 순간을 미리 그려보고 미리 준비하자는 다짐을 했죠. 다행히도 투병한 지 10년 됐는데 정상적으로 일상생활하고 있고, 5년 안에 재발도 없었으니 감사한 일이지요. 가리는 것 없이 잘 먹고 늘 즐겁게 긍정적으로 살고 있습니다.


●● 수도원에서 특별히 마련해준 <해인글방>을 둘러보니 정말 많은 것들로 꽉 차 있네요. 이 많은 물품들과 특히 별실 한쪽 공간을 차지하는 수많은 편지들을 보니 수녀님은 정말 부자이신 것 같아요.

하하. 그렇긴 해요. 청빈하게 살아야하는 수도자에게 과분한 재산들이지요. 앞치마, 뜨개질 한 것, 도자기, 사진, 그림, 글씨, 심지어 배냇저고리까지 직접 만들어 보내신 것들이 많아요. 독자들이 보내 준 것들도 있고 해인글방 방문객이나 낯모르는 많은 분들로부터 온 것들인데. 그 분들의 정성이 담긴 소중하고 빛나는 선물들이라 잘 간수했다가 이 물품들을 필요로 하거나 드리면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분들에게 나눠드리곤 해요. 선물들이 돌고 도는 ‘움직이는 기프트샵’을 통한 ‘맞춤형 나눠주기’라고나 할까요. 법정 스님의 말씀처럼 받을 때보다 나눠줄 때 더 행복하다는 생각입니다.

 

편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 법정 스님 등 종교인은 물론 박완서 선생을 비롯한 작가들, 많은 수감자들, 낯모르는 독자들로부터 받은 건데 너무 많다 보니 요즘 틈틈이 이걸 분류작업하고 있어요. 깨알같이 적힌 정성들인 편지를 보면 너무 귀한 자료라 어떻게 처분할지 고민이에요. 편지박물관을 하나 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또 주고받은 편지를 깔끔하게 모아뒀다가 상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유족들에게 친필 편지를 전해주면 유족들이 받는 감동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요.

 

물론 저도 편지를 통해 감동을 많이 받고 힘도 얻어요. 최근엔 초등학생들이 보내온 편지가 기억에 남아요.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는 한 독자와의 인연으로 그 반 학생들과 인연을 맺었고 제가 직접 아이들의 교실을 방문하기도 했지요. 아이들이 보내온 편지 내용 중 하나인데. ‘이해인 수녀님이 내 옆에서 사진을 찍으실 때 내 가슴이 쿵쾅거렸고, 심장이 멎는 것 같았고, 기절할 뻔했다’라고 쓰여 있었어요. 손자·손녀 같은 어린이에게 이렇게 진한 연애편지 같은 편지를 받고 보니 제가 더 감동받게 되더라고요.

 

●● 2001년 ‘자랑스러운 서강인상’을 받으셨어요. 서강과는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셨는지요?

서강대학이 개교하기 전 학교 설립을 추진하기 위해 한국에 온 예수회원들을 먼저 알게 되었어요. 당시 한국에 온 도일 신부와 미첼 신부가 제게 예쁘다며 조만간 ‘장안대학’이라는 예수회 대학이 개교할 예정인데 이곳에 입학하라고 권유하셨어요. 서강대학 입학시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수녀원으로 직행했지요. 이후 1982년 당시 서강대 총장이셨던 서인석 신부님께서 수도자에게 입학 혜택을 주겠다는 공문을 각 수도회에 보내셨고 당시 우리 수도회 관구장 수녀님께서 제게 권유하셔서 국문학과에 입학했어요. 그러나 학교생활이 제게 맞지 않았어요. 체육시간 마다 나이 40이 다 된 수녀가 수도복 입고 에어로빅을 춰야하는 것도 민망하고 국문과 조교들이 채점했던 독후감 성적은 B, C학점을 받았어요. 오랜만에 공부하는 것도 힘들었고요.

 

한 학기 만에 그만 두고 가을학기에 시험을 치러 종교학과 대학원에 진학했어요. 당시 교수였던 김승혜 수녀님께 종교학개론 수업을 들었는데 과제로 제출한 <길가메시 서사시> 독후감 과제로 칭찬 받았던 게 기억납니다. ‘길가메시와 오딧세우스에게’란 시를 지어서 넣었거든요. 돌아보면 서강에서 비교 종교학 공부를 하면서 다른 종교에 대해 좀 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그리고 잊을 수 없는 절친 故장영희(71 영문) 전 영문과 교수도 서강과의 소중한 인연이네요. 장영희 교수를 통해 서강나눔터나 여러 행사에도 참석하고요. 장영희 교수는 생전에 ‘수녀님 축시를 받기 위해 결혼하고 싶다’고 했었지요.

 

●● 서강 동문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이가 들면 들수록 인간으로서의 마음가짐인 논어의 수기(修己)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스스로 수양해야 한다는 의미인데 내 안의 마음은 누가 만들어주는 것이 아닌 내가 만들어야 하는 것이라 마음을 순간순간마다 선하고 순하게 길들이며 나를 위해 착해지는 마음을 가졌으면 좋겠습니다. 하루하루를 내 생의 마지막 날이라 생각하면서 새로 맞는 일상의 시간들에 감동하고 감사하면 마음이 싱싱해지는 느낌을 갖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해인 수녀는 첫 시집 「민들레의 영토」를 출간한 이래 「오늘은 내가 반달로 떠도」, 「작은 기도」, 「작은 위로」, 「작은 기쁨」, 「희망은 깨어 있네」 등 십여 권의 시집을 냈고, 첫 산문집 「두레박」을 출간한 이래 「꽃삽」, 「사랑할 땐 별이 되고」, 「향기로 말을 거는 꽃처럼」, 「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고운 마음 꽃이 되고 고운 말은 빛이 되고」 등 십여 권의 산문집을 냈다.


부산=글 정명숙(83 불문) 편집위원 사진 정범석(96 국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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